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0년 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개인의 종교의 자유''': 가장 널리 알려진 파급 효과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개인의 종교의 자유'일 것이다. 특히 '개인'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국가 혹은 영지 단위 개념을 희석시켰으며 후의 [[민주주의]] 등장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기까지는 [[교과서]]적인 설명이고, 사실 17~18세기 들어서도 종교를 명목으로 탄압받는 일은 많았다. 주체가 가톨릭 교단에서 국가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다만 교회령은 1624년의 상태로 되돌리기로 결정하고,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부인된 칼뱅파도 루터파와 같은 자격으로 승인되었다. *'''프랑스와 스웨덴의 부상''': 30년 전쟁이 종결된 후, 유럽의 세력 균형은 근본적으로 변해 있었다. 프랑스는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압스부르고 왕조|에스파냐]]를 꺾고 유럽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스웨덴은 발트해의 지배권을 장악해 [[대북방전쟁]] 시기까지 50여 년 동안 명실상부한 [[북유럽]]의 열강국으로 자리잡게 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추락''': [[압스부르고 왕조|에스파냐]]는 가장 높은 세수를 담당하던 부유한 지역인 [[네덜란드]]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의 주도적인 입지도 상실했다.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와 [[스위스]]는 완전히 독립국으로 승인받았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소속 연방국가들에는 완전한 [[주권]]이 주어졌다. 따라서 정신적으로는 [[교황]]이 주도하고 세속적으로는 [[황제]]가 주도하는 유럽의 가톨릭 제국으로서의 [[신성 로마 제국]]은 이름만 남은 채 사실상 해체되었고, 약 300여 개의 영방국가(領邦國家)로 쪼개졌다.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점하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침체기에 들어서고 북독일의 [[호엔촐레른 가문]]이 통치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프로이센 공국]][* 본토인 브란덴부르크와 달리 30년 전쟁의 참화를 피했다.]을 거점으로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 브란덴부르크가 후에 [[프로이센 왕국]]의 모체가 되고 [[독일 통일]]의 핵심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주권국가들의 공동체라는 근대 유럽의 본질적인 구조 확립으로 여겨진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 자체는 이후 부흥에 성공하고 [[중부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잡았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기존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의 영향력은 사실상 상실했으며 오스트리아의 대외 확장 역시 기존의 독일 영방이 아닌 [[동유럽]]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국경]]의 변화''': 각국의 국경선도 크게 변했는데, 스웨덴은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포어포메른]]과 [[브레멘]] 대주교령·페르덴 주교령 등을 획득했고, 프랑스는 메스·투르·베르됭의 세 주교령과 [[알자스]]의 합스부르크 영토를 획득했으며, 브란덴부르크는 힌터포메른·마크데부르크 대주교령·민덴 주교령 등의 영유를 인정, 바이에른은 [[오버팔츠]]의 영유와 [[선제후]] 직위를 인정받았다. *'''화기와 전술의 근대화''': 군사적으로는 [[냉병기]]의 중요성을 슬슬 총포류 등의 화약병기가 따라잡기 시작하며, [[테르시오]]가 퇴장하고 [[전열보병|선형진]]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는 과도기로 볼 수 있다. 주로 개신교 진영의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판 나사우]],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등의 명장들에 의해 이러한 혁신이 이루어졌으며 [* 특히 스웨덴군은 마차에 '''현대 자동차의 차축,브레이크 개념의 시초를 적용해''' 말들의 부상률이 적어져 보급률이 높아졌으며 머스킷의 경량화와 제식화, 포탄 상자의 제식화, 탄통 보급 등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는 혁신을 거듭했다.] [* 거기다가 인쇄 기술의 발달로 인해 구체적이고 자세한 사후 전술 평가가 이루어졌으며 귀족들이 사치를 부리기 위해 권총에 보석과 같은 사치품을 달기 위해 매우 정교한 설계 연구를 기술자들에게 맡기다 보니 무기 설계에 관한 연구도 한 차원 발전하게 되었다.], 결국 전쟁 말기에는 선형진이 테르시오를 물리치기에 이른다.[* 테르시오도 점차 유연해지고 화기 비율이 올라가 큰 차이가 없어지기는 했다.] 과학 기술과 경제력을 갖춘 [[화력덕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럽권의 군사력이 다른 지역 문화권을 압도할 발판이 마련된다. 또 30년 전쟁은 최초로 전쟁 프로파간다가 투입된 전쟁, 최초로 군참 제도를 도입시킨 전쟁으로 평가된다. *'''유례없는 인명피해''': 이 결과 독일 각지의 도시와 마을 및 농장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가령 독일의 도시 마그데부르크의 경우 황제군에 소속된 용병들의 약탈과 파괴로 인해 인구 3만 중 생존자가 5천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보헤미아 지방에 존재했던 49,000개의 마을들 중에서 겨우 '''6,000'''개 정도만 파괴를 겨우 면했다고 할 정도니 얼마나 피해가 큰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예전부터 유럽 사회를 괴롭히던 전염병까지 돌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으며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해 모든 경제활동이 마비 상태가 되고 결혼율 및 출산율은 급감하고 난민이 대거 양산되면서 독일 지역의 인구 손실은 극에 달했다. 30년의 전쟁 기간 동안 줄어든 독일인은 무려 800만 명으로 당시 신성 로마 제국 인구의 1/3에 달했다.[* 단 이 수치는 독일인이 줄어든만큼 전부 죽었다는것이 아니다. 이건 해외에서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현대 역사가들의 보편된 합의에 따르면 이중 적잖은 비중이 다른 안전한 지역으로 도망가거나, 세금과 전쟁을 피해 숲으로 도망가는등 혼란기에 도망을 갔다고 보는게 옳다.몰론 이를 감안하고도 엄청난 인명손실이 발생하였다.] [[가장 피해가 큰 [[뷔르템베르크 왕국|뷔르템베르크]]의 경우 전쟁 이전 인구의 75%가 사라져버렸으며 [[브란덴부르크]]의 인구손실율은 50% 혹은 그 이상의 수치를 기록했다. 특히 종교적 이유로 호구 조사가 쉬웠던 유럽의 사정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도 큰 것으로 예상된다. 오죽하면 당시 독일을 방문하던 잉글랜드 외교관인 리처드 웨스턴(Richard Weston)이 본국의 장인한테 '독일은 황폐화되었고 군대는 약탈없이는 존재할수가 없다'고 한탄하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된 독일의 도시와 공국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에 참가했던 많은 [[용병]]들이 제때 급료를 지급받지 못했는데, 당시 제후들은 용병들에게 제때 보수를 지급할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용주들은 급료를 제때 지급하려 노력했지만, 전쟁 초기를 제외하면 전쟁이 진행될 수록 용병과 군인들이 급료를 제대로 받은 건 거의 드물었다.[*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전쟁은 엄청난 돈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경제 활동이 힘들다보니 생산력도 줄어드는데, 쓸 돈은 엄청나게 늘어나니 주고 싶어도 줄 급료가 없는 것.] 이들은 급료를 못 받는 것은 물론 식량과 장비까지 제대로 못 받는 일도 예사였다. 이 때문에 약탈을 하면서도 죽은 적군이나 민간인의 옷과 장비를 벗겨가는 일도 흔했다. 보급품 충당을 위해 시골 마을들과 도시들을 약탈했으며 따라서 이 전쟁에서 하나의 전형을 이루는 이른바 '[[늑대]] 전략'이 시작되었다. 특히 이로 인해 쌍방 간의 군대는 모두 군대라기 보다 도적떼가 되었는데 진군 중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약탈뿐만 아니라 강간과 살육, 방화까지 저지른데다 주민들을 붙잡아서 학대하거나 노예처럼 부려먹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이를 제지하고 근절해야할 왕과 제후들부터가 군대를 통제하지 못하니[* 왜냐면 보급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군대의 약탈을 막고 처벌하려 들었다가는 군대가 반란을 일으키거나 적군에게 가담할 가능성이 높았다.] 군대의 악행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다보니 주민들은 군대를 매우 두려워했다. [[독일]]은 후일 이 시대를 암흑시대로 정의내릴 정도로 국제적 입지를 상실하고 작은 소국가들로 뿔뿔이 분열되었다. 특히 이 전쟁 때는 식량조차 모자라게 되어 나중에가면 '''[[식인]]'''까지 흔하게 발생하게 된다. 30년 전쟁 관련 다큐에서 당시 시대의 기록과 죽은 사람들의 [[유골]]을 보면 식인의 흔적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실제로 발굴된 이 당시 독일 지역의 유골들만 봐도 거의 검이나 레이피어에 부러진 게 아니라 요리용 칼에 잘려나간 흔적들이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기록에서도 먹을 게 없어서 포로들이나 교도소의 죄수들을 끌어내 잡아먹는 등 온갖 식인 행위들이 대놓고 등장할 정도이다. 이로 인해 식인 연구가들 사이에서도 유럽식인의 역사를 30년 전쟁 당시의 독일을 그 기원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독일 전역을 폐허로 만들어 현대 독일인들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긴 [[제2차 세계 대전]]도 인구대비 비율을 따졌을 경우 30년 전쟁 만큼의 거대한 피해를 끼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사망한 독일인의 숫자는 최대치로 잡아도 인구의 10%를 넘지 않는다.] 한편 프랑스는 이 전쟁 이후 강대국으로서 오랜 기간 유럽의 패권을 호령하게 된다. [[독일인]]들에겐 2차대전과 더불어 지독한 후유증을 남긴탓에 이 전쟁을 한국인들에게 설명하면 한국의 [[6.25전쟁 |6.25]] 와 [[병자호란]]을 합친전쟁을 30년이나 치른거라고 설명하면 한국인들이 이해할 정도로 사실상 근세판 독일[[6.25전쟁 |6.25]]가 이사건이었다.[* 제[[6.25 전쟁]]과 [[30년 전쟁]]은 확대과정과 이후 남긴 후유증을 보면 유사한 구석들이 재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